탁월한 외교관으로서의 저력
유민의 국가관 1
유민은 1943년 10월 판사가 되어 해방될 때까지 일하다 해방 후 정부에서 건국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전념했다. 법관 양성, 한·일회담 준비와 교섭, 해무행정, 법무부·내무부 등에서 유민은 부드러운 성정(性情)의 인품, 비전과 논리적 사고, 통찰력을 가지고 나라의 기초와 질서를 만들어갔다.
1) 대일(對日) 관계에서의 혜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민의 일반적 약력 외에 알려지지 않은 유민의 능력 중 간과해선 안될 것이 바로 유민의
탁월한 외교감각이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유민이 보여 준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는 눈과 대처방안·역할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일관계에 있어 유민의 빼어난 외교적 감각과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을 되새겨 보면, 유민이
국가이익 확보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복잡미묘한 한·일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민은 법무부 조사국장 시절인 1948년 11월, 장래에 야기될 한·일간의 한일합방조약 무효화와 배상,
귀속재산, 재일동포 등의 문제협의 때 필요한 준비를 하는 대일강화준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다.
배상청구에 필요한 증빙자료가 수집되고 대일 배상청구조서 3권이 성안되었다. 언제 쓰이게 될지 모르고
만들었던 이 3권은 정식 한·일회담에서 대일청구권의 기초자료로 유일한 역할을 하였으니, 유민의 혜안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2) 국익을 지켜 낸 유례없는 업적
한·일관계에서 유민의 또 다른 업적은 막대한 국익을 지켰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경제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 및 일본인 재산처리 문제는 한·미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되었으나, 일본은 호의적인 미국의 전후처리를 등에 업고, 이것을 우리 정부에 넘기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일찍이 해외 서적과 신문을 지속적으로 탐독함으로써 이러한 국제적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유민은
재산처리 문제를 미·일강화 조약에서 명문화하지 않을 경우 장차 큰 분란의 소지가 있을 것을 예견,
이에 대한 외교적 대처를 정부에 건의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외교위원회를 구성, 미·일강화조약에 모든 외교력을 기울여 한·미협정에 의해 행해진
일본과 일본국민 재산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조문을 신설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없앴다.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행정관리, 유민 혼자의 힘으로 막대한 국익을 확보한
유례없는 업적이었다.
3) 한·일회담 대표로서의 논리정연함과 당당한 자세 (1951년 10월~1953년 10월)
1951년 가을 유민이 예견했던 한·일회담이 정식 열렸다. 1차 회담부터 참여한 유민은 1953년 제3차 한·일
회담에서, 저 유명한 구보타 망언(妄言)에 논리적으로 정면 대결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고 회담의
주도권을 한국 쪽으로 끌어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측 수석대표로 참석한 구보타는 회의가 시작되면서 우리측의 지극히 정당한 법률적 청구권에 대해
일본이 미·일강화조약 서명을 통해 스스로 포기한 일본인 재산권을 문제 삼자, 홍진기 대표가 구보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맹박하고 나섰다. 이에 논쟁의 주지를 잃은 구보타는 결국 망언을 터트리고 말았다.
  • 구보타(久保田)와의 논쟁
"어느 열강의 밥이 되어 더 심한 고통을 당했을지도 모를 한국을 근대화시켜 준 것이
일본인데,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배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 사유재산의 몰수도 분명 국제법 위반이다." 구보타
"일국의 침략과 점령으로 노예상태였던 민족이 해방되었을 때,
그들을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사유재산의 존중보다 우선이며,
우리는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홍진기
유민과 구보타는 각자 자신의 법이론에 근거,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구보타의 논리는 1차 대전 후의 국제법
체계를 근거로 하고 있었지만, 유민은 2차 대전 후 '해방'이란 새로운 정치현상에 따른 국제법 체계를 근거로
논박했기에 이 법이론 대결은 유민의 일방적 승리였다.
지금도 외교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망언의 근원이자 그 시초가 바로 '구보타 망언' 이었다.
유민은 이러한 일본의 왜곡과 망언행태에 대해 논리적 근거로써 일본을 반박하여 이를 취소케 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일본총리의 사과 후 회담이 재개된 것과, 이승만 대통령이 2차 대전 후 새로운 국제법 이론을 공부해 둔
유민을 격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민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격동기 한국 현대사 주역의 한 사람으로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4) '한국 통일방안'에 기초 다져
유민은 1954년 2월 법무부 차관 임명을 받고 4월 27일 제네바 회담 대표로서 한국의 휴전을 평화체계로
바꾸기 위한 회담에 임했다. '14개조 제안'을 제출, 참전 16개국이 서명케 함으로써 자유진영의 한국통일
방안에 대한 기초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 제네바 회담 대표(1954년 4월)
새로운 정치질서 세운 최연소 국무위원
유민의 국가관 2
1) 수산업 발전에 혼신의 힘 다해
1955년 10월 제2대 해무청장으로 취임한 유민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지방 해무청을
세우는 것을 비롯, 해태와 굴, 통조림사업 지원, 그리고 원양어업을 최우선 사업으로 설정하면서
작은 어촌의 선착장 축조와 복구, 항만, 특히 부산·군산·인천항의 항만복구 계획도 세워 실천하는 등
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해무청장 시절(1955년 10월~ 1958년 2월)
2) 장관재임 시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시기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1958년 2월 20일이었다. 그 때 나이는 불혹이 갓 넘은 41세였다.
건국 후 국무위원으로서는 최연소였다.
그 때 집권당 자유당이나 대통령 비서실과는 평소 접촉이 없었다. 야당인 민주당과는 더더욱 멀었다.
그러나 여야 모두 유민의 능력과 성실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경무대와 여당은 물론 야당으로부터도 환영과
축하를 받는 국무위원이었다.
유민이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가 내각에 있던 기간 중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행정과 사법 분리의 고수, 대공(對共)사찰의 강화, 경제사범 단속, 공무원 부정단속 강화, 폭력배 단속 등에 관한 시책을 성실히 수행, 새로운 국가 기강과 법질서를 만들어 갔다.
  • 법무부 장관 시절(1958년 2월~1960년 3월)
3) 헝클어진 사단(事端)들을 수습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로 유민을 부른 것은 3·15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마산사태'가 일어난지 며칠 안된 1960년 3월 22일 오후 늦게였다.
"아무래도 자네가 내무를 맡아야겠네. 발령받는 대로 마산에 직접 내려가 사건 처리를 하게"
대통령의 분부였다. 그 다음날 23일 내무부 장관 발령을 받았다. 법무부 장관은 공석으로둔 채
최인규 내무의 사표를 수리한 내무경질이었다. 결국 유민은 최내무가 저지르고 헝클어 놓은 사단(事端)들을 수습하고 정리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유민은 1960년 3월 24일 '마산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대책을 마련하는 등 민첩하게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노력했다.
또한 대통령에게 "부통령 선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사태수습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시국수습 방안의 하나로 이기붕 의장을 직접 만나 부통령 당선 사퇴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모든 일들은 '안정의 회복'으로 귀결된 행동이었다.
  • 내무부 장관 시절(1960년 3월~4월)
중앙매스컴의 도전과 영광, 그리고 혜안
희망을 고려한 선험적 언론관 (1964년 9월 ~ 1986년 7월)
정부에서 활동하던 유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유민에게 정부로 복귀하여 더 중요한 일을 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유민은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중앙매스컴을 택해 새 출발을 시작했다.
종합매스컴의 큰 방향을 정하고 이것의 구체화, 실현을 위한 적임자를 찾고 있던 호암 이병철 회장이 유민을 발탁했고, 유민은 정부에서 보여 주었던 능력 못지 않은 중요한 족적을 언론계에 남겼다.
  • 중앙일보/동양방송
1)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기업형 경영을 선언한 중앙일보는 경영태도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파격적인 것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신문, 쉬운 신문, 고객만족의 극대화를 목표로 제시한 유민은 정보가 풍부하고 교육적이며
재미있는 신문을 만듦으로써 1966년 중앙일보 창간 한 해만에 판매부수 1위의 신화를 달성했고,
매년 30%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 1978년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방송에서도 참신성과 적극성을 제작과 편성의 기본지침으로 설정한 유민은 일선에서 직접 제작과 편성을
진두지휘함으로써 라디오는 물론 TBC(동양방송)방송도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른 방송국들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시청률을 높여 나감으로써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풍성한 결실들을 거둬들였다.
유민은 기업적 경영과 함께 매스컴 경영의 또 다른 기둥으로 도의문화의 진작을 강조했다. 도의의 실종에서
오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타개하는데 매스컴이 커다란 책임을 갖고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유민은 종합매스컴센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보산업의 전당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이미 세계화된
시야를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정보화사회를 예견하고 그 준비를 서둘렀다.
유민은 중앙일보 창간 10주년이 되던 1975년에 매스컴의 보다 먼 미래를 이렇게 내다보았다.
"전자·컴퓨터 등 새로운 과학은 매스컴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50년 후 또 어떤 새로운 미디어가 생겨나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거대한 변화가 온다는 것,·······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유민은 50년 후까지 중앙매스컴을 내다보는 설계도를 펴나간 혜안이 있었다.
그리고 유민이 매스컴에 남긴 진정한 가치는 더 높은 이상이다. 공동선(共同善)의 추구, 희망의 회복, 미래를
위한 도전이었다 정치의 혼미, 경제의 빈곤, 국민의 실의, 사회의 불안이 겹겹으로 쌓인 암담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번영·품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2) 국제인과의 폭넓은 교분
유민이 한국 언론에 기여한 일 중의 하나는 언론의 국제 교류를 넓힌 것이었다.
유민이 언론계에 있는 동안 1972년 벨기에 총회에서부터 1985년 동경(東京) 총회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한
회의가 FIEJ(국제신문발행인협회) 총회였다.
유민은 세계 언론과 언론인들이 한국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이해를 넓혀가도록 힘썼다.
특히 1980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총회에서 아시아 지역 대표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FIEJ 본부
이사로 선임되는 등 FIEJ 업무 전반에 관해 기획·감독하며 총회의 의제결정 및 예산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유민은 세계 언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매스컴의 오늘과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누곤 했다.
유럽이나 미국의 언론 지도자들은 유민을 통해 동양의 사상과 철학·역사에 관한 것들을 배웠다.
앞을 내다보고 세계를 내다보는 경영
판단과 결단의 기업관
유민의 경영관은 그 자신 또 그 세대가 이 나라의 기업을 키워 나가고 세계적으로 일궈 나가는 것 자체를
보람으로 삼았으며, 규모와 기술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삼성전자 방문
중앙매스컴이 경영기반을 확립하게 되자, 유민은 경영환경을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등
기업경영에 참여했다.
전자분야의 중요성을 예견했던 유민은 삼성전자 출발 때부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삼성전자가
설립 초기 국내시장 확보가 어려울 때 유민은 수출전략을 통한 이미지 제고 후 국내에 진출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선발업체를 따라잡을 수 있게 했으며, 기업 경영에 있어 장기적·세계적인 안목과 함께 빠른
판단과 결단을 항상 강조했다. 유민은 특히 기업의 공공성을 중요시했고 기업이 튼튼해야 산업이 발전하고 이로 인해 국가경영이 순조로워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이를 위해 기업은 존립에 힘써야 하고 기업경영은
반드시 적절한 이익을 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